조선의 궁중 회화 중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꽃이 바로 모란이다. 화려하면서도 고귀한 이미지를 지닌 모란은 ‘꽃 중의 왕’이라 불리며, 조선 왕실의 권위와 이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도상으로 자리했다. 특히 궁중화원들이 그린 모란도(牡丹圖)는 단순한 장식화가 아니라, 왕조의 안정과 번영, 그리고 부귀와 영화의 상징을 담은 문화적 산물이었다.
조선에서 모란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이유는 중국의 영향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당나라 시대부터 모란은 부귀와 장수를 상징하는 꽃으로 귀족 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전해진 이 상징은 유교적 질서 속에서도 새롭게 해석되어, 왕실의 품격과 권위를 드러내는 장식 요소로 자리 잡았다. 궁중의 병풍, 어좌 뒤의 그림, 혼례 장식 등에 모란이 빠지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궁중화원들은 모란을 그릴 때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상징성과 조화를 중시했다. 꽃잎의 층층이 쌓인 형태는 부귀의 축적을, 짙은 색감은 왕권의 위엄을 표현했다. 특히 여러 송이의 모란이 어우러진 병풍은 ‘만화창연(萬花昌然)’—꽃이 만개한 듯한 이상 세계—을 구현하는 회화적 장치였다. 조선 후기 궁중화가 장승업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 모란은 왕실의 미적 감각을 상징하는 동시에, 화가의 예술적 기량을 드러내는 소재였다.
모란도는 궁궐을 넘어 사대부가와 민간으로 확산되며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사대부들은 모란을 가문의 번영과 학문의 영광을 상징하는 길상화로 즐겨 걸었고, 민간에서는 혼례나 회갑연 때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이러한 확산은 조선 사회에서 모란이 단지 귀족의 상징을 넘어, 모든 이가 바라는 풍요와 안녕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국립고궁박물관이나 궁중문화축전 등에서 재현되는 모란 병풍은 조선의 미의식과 상징 체계를 생생히 전해준다. 붉고 탐스러운 꽃 한 송이에 담긴 권위, 부귀, 그리고 장식미는 단지 과거의 회화 양식을 넘어, 한국 미술 속 ‘상징의 언어’로 남아 있다. 조선의 궁중화원들이 그린 모란도는 결국 권력과 미학, 그리고 인간의 번영에 대한 바람이 하나로 어우러진 문화적 예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