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스러진 청춘을 기억하는 히아신스의 사랑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히아신스는 신과 인간의 경계에서 빛나던 청춘의 얼굴을 지닌 소년으로 등장한다. 태양의 신 아폴론이 총애하던 라코니아의 미청년 히아킨토스는 원반 던지기를 하던 어느 날 비극을 맞는다. 질투심을 품은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바람을 비틀어 원반의 궤도를 돌려놓았고, 그것이 히아신스의 머리를 스치며 치명상을 남긴다. 아폴론은 쓰러진 소년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며 그 피와 눈물에서 꽃을 피워 올린다. 그 꽃이 바로 히아신스다. 전승에 따르면 꽃잎에 새겨진 듯 보이는 ‘AI’의 무늬는 그리스어 탄식사 ‘아이’에서 유래해, 남은 이들의 애도와 슬픔을 상징한다.

히아신스는 단순한 추모의 꽃을 넘어, 사랑의 서약과 변치 않는 기억의 표지가 되었다. 아폴론의 사랑은 죽음 이후에도 꽃으로 이어졌고, 그 사랑의 지속성은 히아신스가 지닌 문화적 의미를 확장했다. 푸르고 맑은 향을 내는 꽃은 청춘의 순정과 덧없음을 동시에 환기하며, 인간의 삶이 한순간의 빛처럼 스러질지라도 그 의미는 형태를 바꿔 남는다는 신화적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서 히아신스의 꽃말에는 ‘슬픈 사랑’ ‘그리움’ ‘영원한 기억’이 겹겹이 포개져 있다.

이 신화는 스파르타 인근 아미클라이에서 열린 ‘히아킨티아’ 축제로 생활문화 속에 뿌리내렸다. 축제는 먼저 애도의 의식으로 시작해, 이튿날에는 음악과 체육, 만찬으로 생명의 환희를 기념했다. 죽음과 탄식에서 시작해 다시 삶과 기쁨으로 넘어가는 이 이중 구조는, 비극을 기억하되 거기 머무르지 않는 그리스적 생명관을 보여준다. 히아신스는 이렇게 지역 축제와 신앙, 일상의 기억을 연결하는 매개가 되며 추모와 재생의 리듬을 상징했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와 시에서도 히아신스는 잃어버린 청춘과 애도의 기호로 자주 소환된다. 차가운 대리석처럼 매끈한 청년의 육체, 빛을 쫓아 회전하는 원반, 그 궤도를 비튼 질투의 바람, 그리고 남겨진 꽃의 향기라는 도상은 사랑과 죽음과 예술의 상관관계를 압축한다. 오늘 우리에게 히아신스는 비극을 미화하는 상징이 아니라, 상실을 기억하면서도 다시 살아가는 힘을 일깨우는 표지다. 바람에 스러진 청춘의 자리에 꽃이 피어나듯, 상처의 자리에서 삶은 또 한 번 향기를 얻는다.